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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의역사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삼국 형성기에 이미 전국적으로 콩 재배가 보편화되고 있었음이 문헌으로 뒷받침되며, 고고학적으로는 1959년 출토된 함경북도 회령군 오동의 청동기 유물인 토기의 밑바닥에서 팥, 조와 더불어 탄화된 콩이 출토되었는데, 오늘날 재배종과 크기가 비슷하여 재배 역사가 오래되었음을 시사한 바 있다. 또한 1972년 경기도 양평군 팔당 수몰지구에서 밑바닥에 콩 무늬가 있는 청동기 유물이 출토된 바 있다. 이성우(1984)는 이러한 유물과 문헌적 고찰을 통하여 옛 고구려 땅과 한반도가 콩의 원산지에 해당하며 농경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청동기시대에 콩 재배가 시작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한 권신한(1983)도 중국에서 기원전 2500년경부터 재배되던 콩이 한반도에 전파되어 농작물로 재배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200~1500년경일 것으로 추정한 바 있다. 콩 재배는 오랜 기간에 걸쳐 계속 확대되었으며, 1930년에 남북한 전체의 콩 재배면적은 두류 총 재배 면적의 약 72%인 792,979ha에 달했다. 그 후에는 재배 면적이 약간 감소되었다. 한편 남한에서는 1950년대 이후에 재배가 서서히 늘어 1968년에는 313,501ha, 245,257톤을 생산하여 최고에 이르렀고 그 후에는 감소 추세였다. · 협동조합의 지속성장 가능성 등
삼국시대의 콩
삼국형성기에 중국의 사서류에 조, 기장, 보리, 콩, 벼 등이 주종을 이루면서 삼국시대로 이어 졌다. 이때 재배되었던 콩에는 흑대두, 황대두, 백대두가 기록되어 있다.
고려시대의 콩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를 걸친 우리나라 삼국시대 전기에 재배되고 있던 콩은 흑대두, 백대두가 주류를 이러었던 것으로 고려시대에소 그대로 이어졌었다. 콩은 얫이름이 숙으로 불리우다가 1376년 이르로 두로 바뀌고 뒤이어 황두로 표현되는 등 변화하여 왔다. 이 때 황대두의 재배가 지배적이었고 발작물의 납세를 황대두로 하였고 미곡에 대응할 정도로 황대두를 널리 재배하였다. 고려 고중(1236년)때 콩나물을 햇별에 말려서 약으로 쓴다고 한 것을 보면 고려사회에서 이미 흑색콩이 실존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콩의 재배법과 직접 관련된 것으로는 고려말 고서의 한구절에서 "돌밭을 갈아 봄에 콩을 심고 물가에 자며 밤에 고기를 낚는다" 하였으니 비옥한 밭 이외에도 돌밭 이를테면 개간한 밭이나 척박토에서도 콩을 재배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춘파하였으니 조파, 만파 등의 파종시기 개념이 이미 성립되어었다.
조선시대 초기(15~16세기 중심)
중국 농서(농서를 우리나라말로 번역하여 널리 후세에 전하였고, 한편 농업의 진흥책으로 농사에 관한 지침서)를 편찬하여 보급하였다 - 콩재배가 단순하지 않았던지 지나치게 파종기에 관심을 두었고 성장과정을 음양설로 식물생리학적 해석에 치중
조선시대 중기(17~18세기 중심)
국내적으로 점차 산업의 진흥을 위한 관심이 집중되기 시작하였고 대외적인 문물의 간접적인 영향으로 살용학문이 성숙되면서 농학은 마침내 조선조 증기사회에서 실학의 중심분야가 되었다.
조선시대 말(19~한말)
우리나라의 전래농법은 17~18세기에 토착화단계를 넘어서 우리나라 풍토에 알맞은 새로운 농법이 영농의 과학화에 접근하고 있었다 조선조 말기의 콩품종은 25품종이 있었다
재배기술의 변천
문헌상으로 보면 1273년 고려 14년에 완선항 중국의 농서에는 처음으로 콩과 팥을 포함하는 주요작물의 재배와 기후, 풍토 및 파종과 같은 재배기술이 해설되어 있고 우리나라에서 전술한 바와 같이 삼국시대 이후의 고농서에서부터 구한말에 이르기까지 차례로 저술된 많은 농서에 콩의 재배기술 또는 품종해설이 많이 소개되어 우리나라의 콩 재배기술의 발달 및 보급에 적지 않은 공헌을 하여 왔다. 그러나 근대적인 시험연구가 시작된 것은 1906년 권업모범장이 설립된 이후이다.